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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에서 피카소까지

헛바람 2010. 9. 13. 13:11

모네에서 피카소까지

클로드 모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 11. 14-1926. 12. 5)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

인상파의 개척자이며 지도자로, 파리에서 출생하여 소년 시절을 르아브르에서 보냈다.

그곳에서 부댕의 문하생이 되어 정식 미술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859년 파리로 나가 피사로·시슬레·르누아르·바지유 등과 사귀게 되었다.

마네의 밝은 화풍에 끌려 밝은 야외 광선 묘사에 주력하였다.

마네를 중심으로 르누아르 및 피사로·드가·세잔 등과 함께 신예술 창조에 전력하였다. 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런던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터너 등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더욱 밝은 색조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귀국 후, 1874년 그의 동료

화가들과 함께 제1회 인상파 전람회개최하였다. 그러나 출품된 작품이 물체 본래의

색깔을 쓰지 않고,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만 그려진 데 대해 비난과 공격이 쏟아졌다.

특히 모네의〈해돋이 인상〉이 가장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인상파'라는 말은 이 때 모네의 작품을 야유한 데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주요 작품에 <짚단>, <수련>, <생 타들레스의 테라스>, <루앙 성당>, <템스 강>

등이 있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출생 :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말라가)

사망 : 1973년 4월 8일(91) 프랑스(무쟁)

국적 : 스페인

분야 : 회화, 소묘, 조각, 판화, 도예

사조 : 입체파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 10. 25-1973. 4. 8)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서양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하지만 프랑스 정부에 의해, 사회주의자로 분류되어 시민권을 갖지는 못했다.

대표작으로 큐비즘의 시대를 연 작품인 ((아비뇽의 처녀들)), 스페인 내전에서 게르니카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게르니카 학살사건(1938)을 고발한 《게르니카》가 있다.

피카소는 1만 3,500여 점의 그림과 700여 점의 조각품을 창작했다.

그의 작품 수를 전부 합치면 25만 점이 넘는다. 피카소 작품의 개수와 다양성 때문에 많은 예술사가들이

그의 작품들을 시기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시도해왔다. 하지만 각 시기의 명칭을 정하고 시기를 몇 개로 나눌 것

인가를 놓고 계속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 1905년 피카소는 이른바 '장밋빛 시대'를 맞는다.

이 시기의 작품들 역시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 그것들은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 색과 분홍 색을 많이 사용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들의 주제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조선일보가 주최한 미국 필라델피아 소장품인 '모네에서 파카소까지'전시가 부산 시립미술관에서열리고 있다.

독자초대에 인터넷으로 응시를 했더니 상복이 별로 없는 내게도 다행하게도 당첨이 되어

어제 마누라하고 같이 시립미술관으로 갔다.

매표소에서 독자 이름을 밝히니 티켓을 주어서 3층으로 올라갔다.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구경을 하고 있었다. 주로 젊은 여자들이 많았고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온 아낙네도 간혹 보였다.

전시실은 네개의 룸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1전시실에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소개와 사실주의와 현대적 삶의 풍경으로, 카미유 코로의

 '테르니의 염소치는 목동' 샘터의 집시여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숲의 언저리'

'시용성' 마네의 '키어사지호와 앨라바마호의 해전' '카르멘으로 분장한 에밀 앙브르의 초상'

특별 전시실의 조각 작품에는 피카소의 청동조각 '올빼미',로댕의'영원한 봄'

브랑쿠시의 '키스' 자코립시프의 '머리를 딴 여인' 드가의 '토르소'

마티스의 '좌대위의 누드'가 전시되고 있었다.

11시부터 큐레이터(미술작품해설가)가 대표작품 몇개를 골라 미술의 사조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주어 작품을 감상하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19세기 중반 쿠르베가 이끄는 소수의 화가들은 역사중심의 전통적 주제에서 벗어나 노동자와

농촌의 삶을 묘사하기 시작하여 사실주의자로 분류되기도 하였으나 대담한 텃치와 밝은 색채를

즐겨 사용한 점에서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다고 한다.


제2전시실에는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인상주의란 작품의 대상물에 빛이 비칠 때의 모습을 순간적으로 빨리 그려내야 하므로

이전의 작품에 비해 캔버스에 붓칠을 하지 못하고 그냥 내버려 두는 곳도 있어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고 하며 강한 인상만을 그린다고 하여 인상주의가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드가의 '발레수업' 카미유피사로의 '루앙의 라크로와심(안개의 인상)' 에나나의 '여름풍경'

르누아르의'누드' '기타치는 여인' '르그랑양의 초상', 모네의 '앙티브의 아침' '석양에 물든 센강'

'수련 일본식 다리'-이 작품은 모네가 말기에 백내장에 걸려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 그린 작품으로

노란빛이 많이 들어간 것은 밝은 빛은 눈에 잘 감지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설자는 설명했다.

반 고흐의 '데이지 꽃이 있는 정물', 폴 세잔의 '부인의 초상'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제3전시실에는 피카소와 아방가르드실로서, 아방가르드란 말은 처음에는 군대용어로 쓰였는데

특공돌격대의 의미였으며, 미술에서는 전위예술이라고 한다.

앙리 마티스의 '아침 식사' '무어병풍', 앙드레 드랭의 '앙리 마티스의 초상', 파블로 피카소의

'여인과 아이들'- 이 작품은 피카소의 가족사진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그는 2번 결혼하고

5여자와 동거를 했는데 여자가 바뀔때마다 그림이 달라졌다고 한다.

샤갈의 '물통, '한밤중', 아마데오모릴리이니의 '푸른 눈(잔 에뷔테른)의 초상'-작가의 부인을 그렸는데

여자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둘은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했고 작가가 병사하자 22세의 임신9개월의 부인은

남편무덤에 같이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한다. 그리고 10년후에서야 유언대로 같이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제4전시실에는 미국작가의 그림들로 '행복한 눈물'의 작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으로 '금붕어가 있는 정물', 유화물감이 나오기 이전

템페라로 아주 사실주의적으로 그린 앤드류 와이어스의 작품으로 '방앗간',뒤상의 '아버지의 초상'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전시실에 작품들을 보고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갔으나 촬영금지로 찍지 못하고

전시실 바깥에 모조품을 파는 것을 찍어 왔다.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 박물관에서도 후라쉬만 사용하지 않으면

사진은 허용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선 과민반응을 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6월2일까지 전시한다니까 구경 한 번 해 보시길!

 

   르누아르의 르그랑양의 초상

 

카르멘으로 분장한 에밀 앙브르의 초상

 

 마티스의 무어의 병풍

 

 파블로 피카소의 여인과 아이들

모네에서 피카소까지는

1. 사실 주의와 현대적 삶의 풍경

2.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3. 피카소와 아방가르드

4. 미국 미술

총 4개의 섹션으로 이루어 지는데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미술 작품들을

시대별로 감상 할 수 있답니다.


1. 사실 주의와 현대적 삶의 풍경

 쿠르베의 시옹성

"천사를 보여달라 그럼 그리겠다"라고 했던 쿠르베는 그만큼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그리겠다는사실주의에

입각한 그림을 그렸답니다.

나이프를 사용하여 덕지덕지 그린 거칠고 잡화적인 그림인 숲의 언저리와 음습함과 블러 느낌이 살아 있는

시옹성의 두 작품을 대할 때 화풍이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어요.

 

 에두아르 마네의 키어사지호와 앨라배마호의 해전

전쟁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내용을 바탕으로 상상만으로 그린 이 그림은

수평선을 높게 그려 전쟁의 공포감을 나타내 직접 보고 그린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잘 그린 작품으로 평가되었다고 하더군요.

 

외젠 루이 부뎅의 에트르타의 절벽

코끼리 모양의 독특한 절벽을 그린 부뎅은 인상파 화가인 모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섹션2에 나올 모네의 에트르타의 만 포르트라는 그림에 코끼리 모양의 절벽을 따라 그려 넣었답니다.


2.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에라니의 여름풍경


그림을 가볍고 경쾌하게 나타내기 위해 이 당시 점묘법을 사용했는데 에라니의 여름풍경에는

땅은 점묘법, 하늘은 점묘법이 아닌 일반 그림으로 그려 한 화가의 두가지 화풍을 볼 수 있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약간 훼손이 되어 수정하는 과정에서 하늘을 다시 덧칠한 것으로 알려졌다더군요.


 

모네의 에트르타의 만 포르트

부뎅의 독특한 코끼리 모양의 절벽을 따라 그린 모네의 멋진 작품입니다.


 

모네의 앙티브의 아침


 

모네의 일본식 다리, 수련


모네의 일본식 다리, 수련은 양평의 세미원이란 곳에 모네의 정원을 만들어 두었다고 하더군요.기회가 되면 찾아가 보고 싶어요..


모네는 나이가 들 수록 점점 추상적인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

마침내 모네는 백내장에 걸리면서 색상이 점점 진해지고 강해지게 되지요.

또한 노란색도 많이 사용하게 되구요~

백내장의 눈으로 보면 노란색이 가장 잘 보인다고 하더라구요.


모네의 세 개의 그림은 시대 순으로 그린 그림으로 그의 화풍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르누아르의 르그랑 양의 초상, 알린샤리고 - 르느아르의 부인


모네에서 피카소까지 티켓에도 사용되었던 르그랑 양의 초상은 사진으로만 보다가 커다란 화풍으로 보니 그 느낌이 사뭇다르더군요.

이 당시 초상화는 브루조아의 부유물이었지만 옷차림새로 보아 그리 부유하지 않은 수줍은 소녀의 모습은 르누아르와 절친했던 사이였음을 알려준답니다.

이 소녀가 결혼할 때 르누아르가 하객으로 참석했다고 하더군요.


알린샤리고.. 르느아르의 부인이랍니다.

색감, 붓터치에서 밝고 경쾌함이 보여집니다.

이렇게 빛을 쏟아 부은 듯한 그림에서 르느아르의 사랑이 엿보이는 듯 하네요.

알린샤리고는 르누아르에게 헌신적인 내조를 했으며 '르느아르는 예술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더군요.

또한 볼의 발그스레한 표현은 르노아르의 트레이드 마크로 행복을 그리는 화가로 일컫는답니다.


 

폴 세잔의 세잔 부인의 초상

이 당시 세잔은 부유한 계층의 사람이었고 아내는 신분이 낮은 계층의 사람이었답니다.

세잔의 아내는 내조도 못하고 멍한 성격 때문에 깡통같은 여자라고 불리웠다더라구요.

또한 세잔은 모델이 숨만 쉬어도 정물이 어떻게 움직일 수 있냐며 호통을 치고

한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모델이 150번이나 세잔을 찾기도 했다니 얼마나 깐깐하기 그지없는지..그래서 이 둘을 '깐깐한 남자와 깡통같은 여자가 만났다'라고 표현했답니다.

세잔은 자신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내조를 잘하는 피사로의 아내가 좋아 집에 가기 싫어했다더군요.하지만 세잔의 아내가 잘 한 것이 딱 한가지 있는데 모델을 서주는 일을 잘 했다고 하더군요.그의 아내를 그린 44장의 그림은 모두 무뚝뚝하고 고달픈 표정을 하고 있다니 왠지 가여워 보이네요.또한 세잔은 사과를 자주 그렸는데 "사과 하나로 이 세상을 놀라게 해주겠다"라는 말을 했답니다.이브의 사과, 뉴튼의 사과, 세잔의 사과라 할만큼 많은 사과 그림을 남겼지요~

 

로뎅의 영원한 봄, 콘스탄틴 부랑쿠시의 키스..


로뎅의 제자인 부랑쿠시는 스승을 뛰어넘은 화가라 칭송받으며 그의 명성을 떨쳤답니다.

중학교 미술 교과서에 실린 부랑쿠시의 키스는 극도로 단순화 시킨 인물과 부드럽고 거친 표현에서

아프리카 조각에 관심이 많았음을 나타냅니다.



3. 피카소와 아방가르드


 

 

마티스의 무어병풍


야수파의 대표주자 마티스의 부인과 딸을 그린 이 그림의 주인공은 뒤편에 보이는 병풍이랍니다.

마티스는 섬유를 많이 그렸는데 특히 동양(이슬람 문화) 문물에 많은 관심이 있었답니다.

이렇게 섬유를 많이 그리게 된 이유는 마티스의 부모님이 섬유를 제작하는 직공이었으며

사는 도시가 섬유산업도시여서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대기 원근법, 공감각, 푸른색 붉은색 등의 화려한 색상을 많이 사용한 그림으로 중후해 보입니다.


 

마티스의 오달리스트


술탄 터키 왕국의 여자 노예로 정부, 우리 말로 하면 후궁을 일컫습니다.

관능적이고 요염하게 표현했으며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원색을 사용해 세련미 넘치게 그린 그림입니다.


 

블로 피카소의 여인과 아이들


피카소는 인간의 이상적인 비례, 쇼킹한 그림 방식의 입체주의로 돈을 많이 번 화가입니다.

화가로는 드물게 부와 명성을 동시에 얻은 화가라고 할 수 있지요.

피카소는 2명의 부인과 5명의 동거인이 있었으며

마흔살의 여자와 여든살의 피카소가 만나 딸도 낳았다고 하니 여성들을 무진장 좋아한 듯 보이네요.


 

아마데오 모딜리아나의 푸른 눈


이 그림의 인물은 모딜리아니의 부인이랍니다.

모딜리아니는 이탈리아 화가로써 163cm의 키에도 잘생긴 외모 덕분에 인가가 많았답니다.

술, 마약, 여자에 찌들어 있고, 폐질환을 가지고 있던 모딜리아니는 36세에 요절을 하고 맙니다.

부인은 모딜리아니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임신 9개월의 몸으로 모딜리아니가 죽은 다음 날

투신 자살을 하고 말지요.

'남편 옆에 묻어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하지만 모딜리아니를 반대했던 그녀의 부모님은 10년이나 지나서야 그녀를 모딜리아니 옆에 묻어주었다더군요.

모딜리아니는 조각가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림에도 그 영향이 미칩니다.

긴 얼굴, 긴 코, 긴 목, 둥근 어깨가 그것이구요. 부랑쿠시와 친했으며 아프리카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네요.


1958년 영화로도 나오게 되는데 영화에서 푸른 눈에 눈동자를 그려넣지 않을 것을 보고 부인이 물어보았다네요..

"왜 눈동자는 그리지 않나요?"

"당신의 영혼까지 사랑하게 되면 그리겠소~"



4. 미국 미술


 

마르셀 뒤샹의 아버지

마르셀 뒤샹은 남성용 소변기를 거꾸로 세워 놓아 사람들을 경악캐 했고,

모나리자 얼굴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려 넣는 등의 그림을 그린 개구쟁이 같은 화가로 불립니다.이 그림은 뒤샹의 초창기 그림으로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렸다고 하더군요.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예술성을 알아 보고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고 하더라구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금붕어가 있는 정물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광고 속에 나오는 대중성을 팔레트로 끌어 들인 화가입니다.

이 작품은 마티스의 금붕어를 패러디한 그림으로

일화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아들이 미키마우스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아버지에게 충격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아빠는 미키마우스 못 그리지?'

그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후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미키마우스와 도널드 덕 그림을 그렸다고 하더군요.그 후 만화적인 요소가 강한 그림을 그린 것 같아요.

 

피카소의 대표작품 해설

 

 

 

 

 

Guernica 게르니카

 

스페인 내란 중 파시스트 독재자인 프랑코 총통은 나치의 폭격을 동원하여 바스크 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하였다. 이들은 3시간 동안이나 폭탄을 퍼부어 2천명이 넘는 시민을 학살하고 수천명의 부상자를 만들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스페인 사람이었던 피카소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폭 약7.8m, 높이 3.5m의 이 벽화를 한 달만에 완성하였고 이 작품은 곧 전쟁의 비참함을 다룬 작품 중 가장 힘에 넘친 걸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피카소는 "그림이란 집안을 장식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적을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피카소는 강력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일정한 디자인의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다. 그는 절망감을 표현하기 위해 흑, 백, 회색의 색상만을 사용하고 있으면 시민들이 당한 폭력을 연상시키기 위해 인물들을 의도적으로 왜곡되게 표현하였다. 입체주의적인 선과 산산이 분할된 면들은 공포와 혼란상을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피라미드 구성은 이것들을 통합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또한 화가는 우의적인 인물들로 이 사건의 공포를 암시하고 있는데, 목이 베인 군인, 죽은 아이를 품은 어머니의 절규 등이 그러하다. 또한 피카소가 사용한 상징들 중에서 부러진 칼을 꼭 쥐고 있는 잘린 팔은 패배를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상징들에 대해 피카소는 직접 언급한 것은 다음의 말뿐이다.

"황소는 파시즘의 상징은 아니나 잔인함과 어둠을 의미한다. 말은 민중을 상징한다."

 

The Blind Man's Meal (1903) 장님의 식사

 

이 당시 그의 작품의 주제 중 하나는 '실명(失明)'이었다. 피카소는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 눈 먼 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깊은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었고 게다가 심한 성병까지 앓고 있었다. 낭만적 파리 생활과는 또 다른 얼굴인 궁핍한 삶의 잔인한 고통과 밑바닥 삶의 근원적 외로움과 소위 민중적 삶의 비참함을 누구보다 몸소 체험하며 그 고통을 짙푸른 청색으로 표현했다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아비뇽의 처녀들

 

 

초의 진정한 20세기 미술 작품이라 불리우는 <<아비뇽의 아가씨들>>은 거의 500여년을 내려오는 서구 미술의 르네상스적 전통을 마감한 문제작이다. 조토와 마사초 이후로 가장 급진적인 혁신을 보여준 이 작품은 미술에 대한 고정 관념들을 산산히 부수고 있다. 다섯명의 나부를 보면 눈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거나 귀가 변형되어 있거나 사지가 제자리에 있지 않아서 해부학적으로 엉망이다. 피카소는 또한 원근법도 파괴하여 차츰차츰 뒤로 후퇴하는 대신 공간을 들쑥날쑥한 면들로 분할하였다. 심지어 한 인물의 눈은 정면을 바라보는데 그 얼굴은 측면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 피카소는 또한 몸통을 작은 면들로 분할하였는데 어떤 비평가는 이를 보고 "부서진 유리의 파편같다"고 평하였다.

이 여인들의 극도로 추한 모습은 그이 화실을 방문하여 이 그림을 본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마티스는 이 그림을 장난으로 그린 것으로 생각했고 브라크는 "불을 뿜으려고 등유를 마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피카소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현대 소설의 작가 제르트뤼드 스타인은 "모든 걸작들이 이 세상에 선보일 때는 이와 같이 추한 모습을 하고 있기 마련이다. 이 추한 모습은 화가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자 투쟁한 흔적이다."라고 이 그림을 옹호했다.

피카소는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지 않고 알고 있는 것을 그린다."고 말했다. 세잔의 기하학적인 패턴에 영향을 받아 피카소는 사물의 진실된 외형을 다시 점으로 분해해서 앞, 뒤, 전방, 후방에서 동시에 분석하고 있다.

 

                                            La Vie (1903) 인생

 

그림에 나오는 남자는 피카소의 친구입니다. 벌거벗은 여자는 그 남자의 사랑하는 여인 이었는데 그 여자는 피카소를 사랑하게 되고 남자는 자살을 하게 됩니다.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 였던 남자를 추모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The Dream(1932) 꿈

 

피카소는 우연히 금발 머리의 젊고 아름다운 한 처녀, 마리 테레즈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녀는 그리스 고전 조각에서 볼 수 있는 똑바른 콧날과 푸른 회색 눈을 가진 아주 이상적 미인이었다. 테레즈는 피카소가 다가가서 자신을 소개했을 때, 당시 이미 유명한 화가였던 그를 알지 못할 정도로 미술에는 문외한이었으며 대화가 통하는 상대는 못되었던 듯 하다. 그러나 피카소는 그 아름다움에 반하여 6개월 동안 구애하였으며 결국 자신의 집 근처에 비밀리에 거처를 마련하여 그 후 몇 년간 열정적으로 이 여인을 소재로 한 작품을 그렸다.

 

파블로 피카소의 [우는 여인] Weeping Woman



 

파블로 피카소 [우는 여인] Weeping Woman(1937)

1937. Oil on canvas. Penrose collection, London, UK



캔버스에 오일로 그려졌으며, 영국 런던의 테이트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 피카소 작품이다. 피카소는 91년간의 생애 중 80여 년을 미술에 바친 대가로서,

회화·조각·소묘·도자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김으로써 20세기 현대미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우는 여자. 이 작품의 배경입니다.

스페인의 공화국정부는 얼마 가지 못하고 프랑코의 파시스트에 패한다.

스페인에선 민주주의가 제대로 펴보지도 못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패배는 피카소에겐 큰

상처를 남겼다. 피카소가 루이 아라공, 폴 에두아르 등 프랑스의 코뮤니스트 예술가들과 급격히

친해진 것도 이때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 공산당에 가입한다. 스페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연일

공포와 죽음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의 마음은 다시 청년 시절의 ‘청색시대’와 비슷해졌다.

 우울하고 슬픈 것이다. 세상의 비극성에 억눌려 있던 화가가 그 비극의 원인에 대해 눈뜨기 시작하고, 고민하기 시작할 때인데, 바로 이때 피카소 옆에 등장한 여자가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도라 마르이다.

아마 피카소의 여인 중 가장 지적인 인물일 것이다.


도라 마르를 만날 때는 그의 곁에 마리 테레즈도 있을 때다. 파카소는 두 여자 사이를 오갔다.

마리 테레즈는 프랑스 출신으로 금발에, 관능적인 몸매에, 청춘의 매력이 넘치는 여인이다. 반면,

 도라 마르는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갈색 머리에, 약간 어둡고, 온화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피카소는 도라 마르와 동거할 때, 세상의 비극을 본격적으로 화면에 담기 시작하는데, 그 비극의 첫째

 이미지가 바로 ‘우는 여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모든 그림들이다. 모델은 도라 마르다.


따라서 동시대의 두 여인이 다른 이미지로 표현된 셈이다. 마리 테레즈가 ‘잠자고 꿈꾸는 여인’이라면, 도라 마르는 ‘우는 여인’으로 그려졌던 것이다. 정동에는 많은 ‘우는 여인’ 중 1937년작 <우는 여인>이

걸려 있고, 이 그림 이외에도 도라 마르를 그린 다른 초상화도 볼 수 있다.


한편, 시대의 비극성을 상징하는 또 다른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게 황소다. 피카소는 원래 투우를 좋아

했다. 그런데 전쟁을 겪으며, 소는 죽음의 희생양으로 새로 해석됐다. 물론 정동에서도 여러 장 볼 수 있다.


작품의 표현방법입니다.


이 작품은 에스파냐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의 대표작《게르니카 Guernica》의 습작에서 시작되었다. 피카소는 이 주제에 매료되어 《게르니카》를 완성한 후에도 여러 점을 제작하였다. 즉,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는데, 《잠자는 여인》《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매우 다양하다.

전쟁의 비극을 통한 여인들의 슬픔을 상징화한 작품으로, 울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분해한 뒤 재조립하는 피카소 특유의 표현법으로 제작되었다. 배경의 검은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흐르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듯이 표현하고 있다. 마치 아동화같이 소박하고도 상징적으로 표현한 피카소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이 작품의 모델은 에스파냐내란이 한창 진행 중이던 시절에 만난 피카소의 다섯번째 연인 도라 마르이다. 이 여자는 《게르니카》을 그리는 데 많은 영감을 주기도 했는데, 의문의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음이나 눈물보다 먼저 들어나는것이 있다면 그건 표정일 것이다. 그림속에서 한 여자가 통곡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여인의 통곡은 소리내어 통곡하기보다는 슬픔이 복받쳐 가슴으로 울고 있는듯한 표정이다. 다양한 각도에서 사물을 보아야만 숨겨진 진실을 파악할수 있다고 생각한 피카소는 여인의 앞모습과 옆모습을 동시에 그려 고통스런 얼굴을 기하학적 형태로 해체해서 일그러진 표정을 잘 담고 있는데 입체주의를 만들어가는 피카소의 탁월한 능력이 느껴진다.

마르지 않는 조형(造形)의 샘





19. 소의 두개골

피카소는 1946년 12월 이렇게 말했다. '밤의 빛의 효과는 매우 매력적이다. 자연 광선보

다는 더 좋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서도 밤에 한 번 찾아와 주기 바란다. 대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광선, 내 그림을 둘러싸고, 뒤 벽에 비치는 깊은 그늘, 이 빛을 당신은 내

가 거의 밤에 제작하는 정물화에서 발견할 것이다. "전쟁 중에 피카소는 인간이나 두개골

을 주제로 한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도 그 중의 한 점이다. 또 4월 16일에는 피가 흐르

는 두개골, 새하얗게 바랜 염소의 두개골을 흑백의 단순한 구성으로 제작하였다. 흑과 백,

 낮에 대한 밤, 폭력에는 결코 굴할 수 없는 피카소의 저변이 있다.


 

20. 앉은 아를캥

이 그림의 모델은 피카소의 벗인 화가 살바드이다. 피카소는 그를 아를캥으로 몇 점의 작

품을 제작했으나, 한결같이 초상화로서의 성향이 짙고, 차분히 가라앉은 인물화였다. 아를

캥은 원래 이탈리아 희극의 어릿광대 역이나, 여기에서는 웃기기는커녕 오히려 엄숙한 분

위기마저 보인다. 피카소의 연구가들은 살바드의 정면상 아를캥과 독일 르네상스의 화가

한스 홀바인이 초상화 <안느 드 크레브>와 비교를 하고 있으나, 오히려 앵그르의 초상화

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무튼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21. 꿈

"그림이란 당초부터 이미지 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정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제작을 하다

보면 점점 떠오르는 상념을 좇아서 완성했다고 생각하면 또다시 앞이 나타나 그림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변화해 가는 것이다. 그림이 그것을 보는 사람을 통하여 비로소 생명력

을 지니게 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1923년 피카소는 이 해에 졸고 있는 여인을 많

이 제작했다. 피카소의 말대로 정면상과 프로필이 일체가 되어 감상 자의 기분에 따라서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꿈>은 그것들 시리즈 중의 걸작이다. 정면상과 프로필의 이중

 상은 형체의 묘미와 동시에 현실과 꿈의 이면성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22. 소나무 아래의 나부

1955년의 <알제의 여인들>이나, 57년의 <궁녀들>의 연작에서 어느 것이든 실내가 무대

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피카소는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나부를 풍경 속에 배치하고 있다.

나부의 육체의 선은 배경의 언덕의 선과 하나로 되어 있다. 소나무 가지는 화면 오른쪽 앞

에 푸른 그늘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무는 대지 그것인 양 엷은 갈색이며, 피카소의 저의는

 '대지=어머니' 라는 것으로만 보인다. 피카소 이때 나이는 78세였다.



 

23. 앉은 여인

1920년이래 이따금 피카소는 남 프랑스의 앙티브 지방들을 들르고 있었다. "나는 예언자

라고 자처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사실 내가 여기에 와서 놀란 것은 여기에 있는 모든 것

이 일찍이 내가 파리에서 그리던 그 모든 것과 너무나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곳의 풍경은

 일찍이 내것이었다고 말해야겠다."라고 피카소는 말 했다. 피카소의 독특한 조각적인 형

태를 말하여 지중해적인 인간의 특색이라고도 한다. 피카소가 그린 여인은 지중해의 여신

이며, 푸른 배경, 거침없이 당당한 여성상, 피카소에 있어서는 그림이란 우상에 가깝다.



 

24.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

"나는 전쟁을 그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카메라처럼 한 가지 주제만을 좇는 화가가

 아닌 까닭에, 그러나 내가 그린 그림 속에 전쟁이 존재한 사실은 부정할 수 없고, 필경 후

세 역사가들은 내 그림이 전쟁의 영향 아래서 변화한 것이라고 지적할 것이나, 이 또한 내

알 바가 아니다." 제 2 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에 피카소는 이와 같은 피카소다운 말

을 남겼다. 피카소는 1930년 말, 브뤼겔이나 고야의 <전쟁의 참화>를 거쳐, 이어지는 유

럽의 정신적 위기에 대한 경고라도 하듯이, 전쟁의 암시적 주제를 많이 택한 것이다. 피카

소에 있어서 역사는 이러한 무수한 희생에 의하여 성립되는 시간의 경과일 뿐이다.


 

25. 아침의 곡

오바드(aubade)란 말은 어떠한 사람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 집 앞에서 새벽에 연

주하는 주악을 말 한다. 그러나, 이 그림이 주는 인상은 <아침의 곡>이라기보다 오히려 어

둡고 불길하다. 옆으로 누운 사람은 죽은 사람 같고, 만돌린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은 꼬박

밤을 새우고 외롭게 보인다. 1942년 피카소는 61세로서 이 해에 <옆으로 누운 나부> 연

작을 발표했다. 그것은 피카소 작품에서의 얼굴의 경우와 같이 이중 상으로서 구성하고 있

다. 이 점이 바로 피카소의 일관된 조형의 수단으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후일에 제작된

 걸작 <납골당>의 선구적 작품으로서 주목된다.


 

 

26. 화가의 초상

 


27. 화가와 모델

 


28. 여인과 개

 


29. 피아노


 

30. 화가와 모델

 

 

 

31. 화가와 모델

'화가와 모델'은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이라는 관계에서 화가에게 있어서는 영원 주

제의 하나에 틀림 없다고 피카소가 말했다. "나는 나부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

려 나는 사람이 단순하게 나부를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리려고 한다." "화가에게는

끝이 없다. 오늘은 작업이 끝났으니, 내일은 휴일이라는 것이 화가에게는 없다. 가령 화가

가 제작을 중지하면,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화가는 화면 속에

 '끝'이라는 것을 써넣을 수가 없다." 방법은 한 가지, 즐기면서 제작하는 도리밖에 없다.


 


 

32. 지중해의 풍경


 

33. 손수건을 쥐고 우는 여인

'우는 여인'은 <게르니카>의 습작에서 시작된다. 피카소를 매료시킨 주제로서 <게르니카

>완성 후에도 피카소는 여러 점 제작했다. 피카소는 여인들에게 많은 변화를 주어 작품을

만들었다. '잠자는 여인' '춤추는 여인' '독서하는 여인' '거울을 보는 여인' '포옹하는 여

인' '울부짖는 여인' 등 그 변화는 더 많다. 배경의 검은 색 속에서 선명하게 얼굴과 손이

부상하고 있다. 눈물을 그린 것도 사실적인 것을 피하고 추상적이며, 기호적 눈물은 흐르

는 것이 아니라 튀어나오는 것을 매우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아동화같이 소박하고 그

리고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34. 납골당

<게르니카> 이후 가장 주목할 작품이다. 1946년 2월 파리 근대 미술관에서 개최된 '예술

과 혁명'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에서 전사한 스페인 무명 전사

를 추도하는 전시회이다. 납골당의 내부는 회색과 보라, 푸른색의 3색으로 요약하여 이 정

적한 톤은 <게르니카>의 경우와 같이 색채의 잔소리를 극도로 억제하고 정신적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묶여진 팔, 어린 아기의 목, 겹겹이 쌓인 시체더미 위에 지금 새벽이 찾아

오고 있다. 그들의 죽음 위에 찾아드는 아침은 자유의 커다란 아침이다.


 


35. 파이프를 문 사나이

피카소는 프랑스와즈 지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방은 시메트리가 아니다. 무엇

이나 그러하다. 여성은 누구나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유방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은 현실적

으로는 시메트리로 되어 있을지는 모르나, 회화에서는 똑같이 그려서는 안된다." 피카소에

 의하면 두 개의 비슷한 것을 구별하는 하나의 팔, 하나의 유방이 나타내는 제스처이다. 그

래서 피카소의 얼굴, 피카소의 인체는 남녀 구별 없이 온갖 제스처의 집적이다. 그러면 피

카소가 그린 인간은 산산조각이란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형태는 연쇄 반응과 같이 밸런

스를 허물어뜨리고, 균형을 만드는 것으로, 이 작품의 경우에서는 눈, 코 와 파이프와의 관

계이다.


 

36. 실베트의 초상

실베트는 피카소가 리베라에서 알게 된 젊은 아가씨로서 그는 12점의 연작을 만들었다.

실베트는 금발의 북 유럽계 미인으로서 피카소는 그녀를 회색의 단조로운 색조로 처리하

였으며, 이것이 연작의 최대 매력이기도 하다. 연작 속에는 실베트를 입체파 시대와 같은

 기하학적인 포름으로 환원하여, 그녀의 얼굴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작품도 있다. 이 작품

은 품격도 있고 사실적인 화면으로서, 피카소는 그 당시 유행하던 이 소녀의 머리형에 매

혹 당한 듯하다. 피카소의 인물화로서는 새로운 양식이기도 하다. '포니 델'이라는 유행하

던 머리형에 착안하는 등, 과연 피카소 다운 인기의 비밀이 있다.


 


37. 궁녀들(벨라스케즈에 의한)

벨라스케즈의 <궁녀들>은 프라도 미술관의 보물이며, '회화의 신학'으로까지 평가된다.

 1952년 계획하여, 실제로 착수한 것은 1957년이었다. 이 해에 피카소는 연작 44점을 제

작하였다. 피카소는 "같은 주제에 의한 연작으로 최초의 두 점 중의 한 점, 최후의 두 점 중

의 한점을 최고의 작품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1957년 8월 17일에 완성한 첫 번째 작품으로 검정, 흰색, 회색만으로 처리하였

으며, 벨라스케즈의 원작과는 화면의 규격이나 내용에 있어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38. 아비뇽의 아가씨

입체파에 들어선 피카소의 대표작이다. 흔히들 이 작품을 두고 20세기 회화 사상 가장 주

목할 작품이라고 들 하는 것은 이 그림에는 기하학적 포름으로 환원된 인체와 반추상의 형

태가 나타난 까닭이다. 최초의 습작에는 나부들 속에 두 사람의 옷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것은 창부의 집이었을까. 한 남자는 뱃사람이고, 다른 한 남자는 두게골을 가지고 들어

오는 것이다. 두개골이 죽음의 상징인 까닭에 필경 피카소는 남녀의 영원한 육체의 연옥을

 그리려고 했을 것이다. 차츰 남자의 모습은 사라지고 여자들만이 남았다. 이 작품은 형태

상의 문제도 있지만, 여성들의 근원적인 생명력의 강한 호소도 보인다.


1907년 캔버스 유채 245X235Cm 뉴욕 근대 미술관 소장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Nude, Green Leaves and Bust)'


피카소 작품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Nude, Green Leaves and Bust)'은 4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소에서 1억640만달러(한화 1180여억 원)에 낙찰됐다. 이는 지난 2월 자코메티의 조각이 소더비 런던에서 낙찰되며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던 1억430만달러를 웃도는 가격이다.

'누드, 녹색 잎과 상반신'은 1932년 피카소가 연인인 마리 테레즈를 모델로 그린 작품이다. 마리 테레즈는 피카소의 네번째 연인으로 17세때 거리에서 만났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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